유인태 : 대한민국 제32대 국회사무총장, 그에 대해 알아보자.
유인태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참여정부에서 초대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으며, 제32대 국회사무총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1948년 9월 5일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난 그는 문화 류씨 가문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세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제14대, 17대, 19대 국회에서 활약했다. 병역은 수형으로 인해 소집면제를 받았고, 현재는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유인태는 오랜 정치 경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당직과 공직을 수행해왔다. 한겨레민주당 시절부터 정치활동을 시작한 그는, 민주당,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등 여러 진보계 정당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다. 참여정부에서는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고, 국회에서는 행정자치위원장, 국회사무총장 등 중요한 직책을 수행했다.
가족으로는 배우자 이혜경 씨와 두 아들 유동렬, 유웅렬이 있으며, 남동생 유인택은 예술경영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유인태는 정치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원로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도 정치적 조언자이자 자문위원으로서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칼럼] 민주화의 고통을 견딘 정치 원로, 유인태의 길고도 복잡한 궤적
유인태는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인물이다. 그는 1948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으며, 청년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의 생애는 단순한 정치 경력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유인태는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고문을 견뎌냈고, 사형 선고를 받은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4년 넘게 복역한 경험이 있다. 이후 2012년, 무려 38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으며 명예를 회복했다. 그의 이력은 단지 ‘국회의원’, ‘정무수석’, ‘국회사무총장’이라는 직함으로만 정의되기 어려운, 시대와 국가의 역사를 함께 견뎌온 증거다.
그는 정계에 입문한 이후로도 순탄한 길을 걷지는 않았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이후 수차례 당적을 바꾸며 정치의 중심과 변방을 오갔다. 민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까지 여러 정당을 거친 그의 정치 이력은 복잡하면서도 흥미롭다. 때로는 합류하고, 때로는 이탈했으며, 어떤 때는 잠시 한나라당에 몸을 담기도 했다. 정치 신념보다는 현실적 판단과 정국의 흐름에 따라 행보를 조정했던 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러한 유동성 속에서도 유인태는 늘 중심에 가까운 인물로 기능해왔다. 특히 참여정부 당시 정무수석을 지내며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국정의 핵심을 이끌었고, “엽기수석”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만큼 솔직하고 거침없는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유인태의 진면목은 정계 은퇴 후 오히려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는 방송과 언론을 통해 정국을 진단하며 날카로운 평론을 이어갔다. 진보 진영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때로는 여권 인사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 같은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언행은 언론과 시민들로부터 ‘야권 원로’로 불리게 만들었으나, 동시에 당 내부에서는 점차 외면받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 관련 사안이나 한동훈 장관에 대한 호평, 이재명 대표에 대한 비판은 당내 강성 지지층의 비판을 사기도 했다. 유인태는 이러한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물러날 줄 아는 것이 삶의 미덕”이라며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에서 물러났다. 당시 그는 자신이 물러나지 못했던 이유로 ‘당이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담담한 해명을 남겼는데, 이는 단순한 정계은퇴 이상의 철학적 성찰로 읽히기도 한다.
오늘날 유인태는 과거 진보 진영의 상징에서, 중도 보수에 가까운 원로 평론가로 변화해 있다. 민주당의 독선, 강성 지지층의 폐쇄성, 검찰개혁의 전략적 실책 등을 거침없이 지적해왔고, 그에 따라 민주당과는 거리감이 커졌다. 그는 한때 자신이 뿌리내린 정치세력에게 비판을 가하며, 동시에 그 정치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 최근에는 제22대 총선에서 이준석 후보의 당선을 예측하며 ‘소망이 담긴 예측이었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는 정치판에서 여전히 그의 촉과 감각이 살아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동시에, 유인태가 과거의 정치적 신념과 오늘의 현실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한다.
결국 유인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굴곡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의 대표자이다. 그는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이자 주체였으며, 권력의 중심에서 정치를 설계한 실무자였고, 은퇴 후에도 정치를 향한 애정과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지 않은 ‘정치 원로’로 남아 있다. 이제 그는 민주당에게도 완전한 내부자가 아닌 존재가 되었고, 진보와 보수, 여야 모두로부터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정치의 본질을 성찰하는 입장에 서 있다. 유인태의 삶은 한 인물의 정치적 궤적을 넘어,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축소판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말한다. "정치는 타이밍이고, 타이밍을 놓치면 누가 옳고 그르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 말은 어쩌면 그가 평생 동안 지켜온 태도이자, 오늘의 한국 정치가 다시 귀 기울여야 할 경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