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 감독, 관계자 등

이민성 :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그에 대해 알아보자.

tpzjs6 2025. 6. 6.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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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성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구인으로, 1973년 6월 23일 경기도 시흥군 서면(현 경기도 광명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82cm의 신체 조건을 바탕으로 선수 시절 주로 센터백과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축구 선수로서 부산 대우 로얄즈-아이콘스(19962002), 상무 축구단(19992001, 군 복무 기간), 포항 스틸러스(20032004), FC 서울(20052008), 그리고 용인시청 축구단(2010) 등 다양한 구단에서 뛰며 뛰어난 수비 능력과 경기 운영 능력을 선보였다. 국가대표로도 67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했으며, U-23 대표팀에서도 11경기에 나서 팀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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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생활을 마친 후에는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용인시청 축구단에서 플레잉 코치(2010), 코치(2011)를 거쳐 광저우 헝다 2군 감독(2012), 강원 FC 코치(2012), 전남 드래곤즈 코치(20132014), 울산 현대 코치(20152016), 창춘 야타이 코치(20162017) 등 국내외 다양한 구단에서 코치로 경험을 쌓았다. 특히 대한민국 U-23 대표팀 코치(20182020)로 활약하며 유망주들을 지도했고, 대전 하나 시티즌 감독(2021~2024)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2025년부터는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이민성

학력으로는 서울시흥초등학교, 문일중학교, 문일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아주대학교 인문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해 학사 학위를 받았다. 군 복무는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으며, 상무 축구단에서 병역을 마쳤다. 축구 선수와 지도자로서 한국 축구에 오랫동안 헌신해온 이민성은 국가 대표팀과 클럽 팀 모두에서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민성(李敏成)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서 독보적인 수비수 출신으로, 선수 시절과 지도자 생활 모두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다. 현역 시절 센터백과 수비형 미드필더를 오가며 뛰어난 수비 능력과 함께 골 결정력까지 갖춘 다재다능한 선수로 이름을 알렸으며, 특히 1997년 일본과의 아시아 최종예선 경기에서 기록한 역전골 ‘도쿄 대첩’으로 국내 축구 팬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이후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출전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중심 수비수로 활약했고,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변신하여 2021년부터 대전 하나 시티즌 감독으로 부임, 단 2년 만에 구단을 8년 만에 K리그1으로 승격시키는 성과를 거두며 축구계에서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1. 이민성 - 초기 생애와 클럽 선수 경력

 

이민성은 문일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대우그룹의 후원을 받던 아주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동기였던 명진영, 우성용, 하상수 등과 함께 프로 선수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1996년 23세에 부산 대우 로얄즈(후에 부산 아이콘스) 3차 지명으로 프로 데뷔를 했다. 신인 시절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며 차범근 감독 시절 국가대표팀에도 꾸준히 발탁되어 1997년 부산 대우 로얄즈가 리그, 아디다스컵, 라피도컵 등 트레블을 달성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99년에는 상무에 입대해 군 복무를 하면서도 특이하게 스트라이커로 기용되는 경험도 했다. 2001년 군 복무를 마치고 복귀했지만 초기 연봉 협상 문제와 부상으로 인해 경기 출전이 어려웠으며, 팀에서는 윙백 송종국이 센터백으로 기용되는 등 변동이 있었다. 이후 1억 2천만 원에 재계약하며 복귀했다.

2. 포항 스틸러스 시절

 

2003년 자유계약 선수 신분이 되어 미국으로 떠난 홍명보의 대체자를 찾던 포항 스틸러스에 1억 5천만 원의 연봉 조건으로 이적했다. 포항에서 등번호 20번을 달며 구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2시즌 동안 65경기 3골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준우승에 기여했다. 30대에 접어들면서 체력과 부상 문제로 인해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일부 변경, 노련한 수비 조율 능력과 대인 마크에 뛰어난 모습을 보이며 팀을 이끌었다. 당시 포항은 우승 문턱에서 아쉽게 고배를 마셨으나, 이민성의 활약은 K리그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3. FC 서울에서의 활동과 부상

 

2005년 FC 서울로 이적하며 주장으로 임명되어 팀을 이끌었다. 2006년 리그컵 우승에 힘을 보탰으며, 시즌 종료 후 재계약에 성공했다. 하지만 2007년 경남 원정 경기 도중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심각한 부상을 당해 시즌을 조기 마감했다. 부상에서 복귀해 2008년 초반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같은 해 음주운전 뺑소니 사건으로 구단에서 방출되며 프로 선수 생활에 큰 타격을 입었다.

4. 국가대표 경력

 

1995년 다이너스티컵 중국전에서 국가대표로 데뷔한 이후 1997년 ‘도쿄 대첩’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일본과의 아시아 최종예선 경기에서 후반 41분 극적인 역전골을 넣어 2:1 승리를 이끌었고, 이는 한국 스포츠 역사상 일본에서 열린 국제대회 경기 중 가장 쾌감을 준 순간 중 하나로 회자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선 등번호 5번을 달고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의 조별리그 전 경기에 풀타임 출전했으나 세계 무대의 높은 벽에 부딪히고 좌절을 맛봤다. 특히 멕시코전에서 수비 불안으로 아쉬운 모습을 남겼지만 벨기에와 무승부로 대회를 마쳤다.

2000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출전 기회가 적었으나 4강 진출에 기여했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히딩크 감독 체제에서 대체 불가능한 수비수로 활약했다. 비록 8강전까지 출전하지 못했으나 준결승 독일전 교체 출전하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 경기에서 미하엘 발락의 실점 장면이 이민성의 실책으로 지적받기도 했지만, 사실상 그의 과실은 아니었다. 이후 3/4위전에서도 출전했으나 대한민국은 아쉽게 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2004년 AFC 아시안컵 중국 대회에선 스리백 중앙 수비수로 선발되어 주전으로 뛰었으나 이란과 8강전에서 패배하며 탈락했다. 이후 김진규, 김영철, 박재홍 등에게 밀리며 대표팀 은퇴 수순을 밟았다.

5. 지도자 경력

 

FC 서울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후 대한축구협회 2급 지도자 과정을 이수하고 2010년 내셔널리그 용인시청 축구단의 플레잉 코치로 지도자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1급 자격증이 없어 선수 등록도 병행했다가 한 시즌 뒤 최종 은퇴했다.

이후 2021년 대전 하나 시티즌 감독으로 부임, 팀을 리빌딩하며 2년 만에 K리그1 승격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지도자 생활에서도 선수 시절의 경험과 노련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대전 팬들 사이에서 ‘민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6. 사건 및 논란

 

이민성의 커리어에서 가장 큰 오점은 2008년 음주운전 뺑소니 사건이다. 당시 만취 상태로 BMW 승용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고 현장을 이탈해 불구속 입건됐다.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69%로 만취에 가까운 수준이었으며, 이 사건은 K리그와 축구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결국 FC 서울에서 방출되어 프로 선수 경력은 사실상 종료됐다. 이후 한동안 은퇴 상태였다가 2010년 잠시 내셔널리그에 복귀했다.

7. 개인적 에피소드와 여담

 

이민성은 대전 하나 시티즌 감독으로 부임한 후 주로 구단 패딩과 운동복 차림으로 벤치에 앉았으나, 2023년 K리그 홈 개막전에서는 처음으로 정장을 입고 경기에 임하는 등 스타일 변화도 있었다. 이는 구단의 승격과 홈 개막전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97년 도쿄 대첩의 골이 오히려 선수 생활에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 골로 인해 대표팀에서 부진할 때도 계속 그 골 하나로 평가절하되는 등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감독으로서 선수들과 팬들에게 진심 어린 소통을 보여주며, 시즌 초반 어려움 속에서도 구단 직원들에게 커피와 손편지를 선물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어 많은 이들의 호감을 얻었다.

8. 결론

 

이민성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수비수 출신 선수로서, 국가대표팀과 프로 무대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선수 시절 ‘골 넣는 수비수’라는 별명에 걸맞게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으며, 대표팀에서는 2번의 월드컵 본선에 나서 경험과 실력을 증명했다. 지도자로서도 승격이라는 성과를 거두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그의 커리어는 빛나는 순간과 더불어 음주운전 사건이라는 어두운 면도 있지만, 그 모든 경험을 딛고 다시 축구계에 헌신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다. 앞으로도 대한민국 축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계속해 나갈 것으로 기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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