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록 : 1970-80년대 인기 가수, 그에 대해 알아보자.
전영록(全永錄, Jeon Young-rok)은 1954년 3월 26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대중가수다. 본관은 천안 전씨이며, 아버지는 배우 황해, 어머니는 가수 백설희로 예술적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는 서울동신국민학교, 한양중학교, 영락고등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했으나 중퇴했다. 1973년 '나그네 길'로 데뷔해 올해로 데뷔 51주년을 맞았으며, 수많은 히트곡과 꾸준한 활동을 통해 오랜 세월 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신체 조건은 168cm에 60kg이며, 혈액형은 B형이다. 병역은 육군 제15사단에서 병장으로 복무 후 제대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종교는 불교이며, 데뷔 이후 가수 활동뿐 아니라 연기와 방송 활동 등 다방면에서 활약해 왔다. 전영록은 유튜브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팬들과 소통을 이어가며 세대를 아우르는 예능 감각과 무대 매너로 대중문화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가정사로는 아내 임주연과의 사이에서 전보람, 전우람 두 딸과 전유빈(2002년생), 전효빈(2006년생) 두 아들을 두고 있다. 특히 딸 전보람은 걸그룹 티아라의 멤버로도 유명하다. 전영록은 가족들과의 돈독한 관계와 오랜 연예계 생활 속에서도 변함없는 성실한 이미지로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어왔다.
전영록, 돌아이라 불린 슈퍼스타: 시대를 넘어 선 ‘만년 소년’의 자화상
한국 대중문화사의 풍경 속, 전영록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한 시대의 스타를 넘어서 대중문화의 흐름을 꿰뚫는 상징이자 기억이다. “돌아이”라 불릴 만큼 자유롭고도 파격적인 감성을 가졌던 그는, 1970~80년대의 한국 사회 속에서 대중과 함께 숨쉬고, 노래하고, 연기하며 살아낸 살아 있는 시대의 아이콘이다.
부친은 충무로의 전설적 배우 황해, 모친은 ‘봄날은 간다’로 유명한 가수 백설희. 예술적 혈통을 타고난 전영록은 태생부터가 연예계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가 이덕화, 최민수, 조형기, 허준호 등 영화계 거장들의 자제들과 어릴 적부터 어울렸다는 사실은, 그의 삶 자체가 한국 연예계의 역사라는 것을 웅변한다. 그리고 1971년 기독교방송 영 페스티벌로 방송계에 발을 들이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첫 전성기는 1970년대 청춘 드라마와 영화 속 주인공으로부터 시작된다. 임예진, 김보연과 함께한 멜로 영화에서 그는 당대 젊은이들의 정서를 대변했다. 1975년 ‘편지’로 가수로 전향한 이후,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대중성과 카리스마로 대중 앞에 나섰다. 조용필이 압도적 인기를 누리던 1980년대, 전영록은 ‘2인자’로 분류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그가 얼마나 독자적인 팬덤을 형성했는지를 보여주는 타이틀이었다.
‘종이학’,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불티’, ‘그대 우나봐’, ‘저녁놀’—이 곡들은 단순히 히트곡이 아닌, 당시의 사회 정서와 젊은이들의 감성을 대변하는 문화적 기호였다. 특히 여중고생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오늘날의 ‘아이돌’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부터 그가 대중문화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1986년과 1987년 KBS 가요대상 2연패는 전영록이 얼마나 오랫동안 대중의 지지를 받아왔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전영록은 단지 노래만 잘한 것이 아니다. 그는 배우로, 작곡가로, 그리고 라디오 DJ로서 다방면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1980년대 액션영화 ‘돌아이’ 시리즈는 전영록이라는 인물이 단지 감성적인 가수에 그치지 않고, 신체적 에너지와 카리스마로 무장한 배우였음을 입증하는 사례다. 그는 당랑권 유단자로서 직접 액션 장면을 소화했으며, 그의 너스레에 따르면 “나만큼 키 작은 스턴트가 없어서” 직접 모든 장면을 해냈다고 한다. 하지만 1987년 ‘독불장군’의 실패 이후, 그는 액션 장르를 떠났다.
음악적으로도 전영록은 자신의 히트곡뿐 아니라 수많은 가수들에게 명곡을 안겨준 작곡가였다. 양수경의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이지연의 ‘바람아 멈추어다오’, 김지애의 ‘얄미운 사람’ 등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한 히트곡들이었다. 특히 가수로는 비인기층이었던 김지애에게 곡을 제공해 대성공을 이끌어낸 것은 그의 작곡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는 “전영록의 곡이면 누구든지 뜬다”는 명제를 낳게 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의 경력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1990년대 이후의 행보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계기로 한국 가요계가 격변기를 맞으며, 그는 이전만큼의 인기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심사위원으로 출연했던 방송에서 서태지의 ‘난 알아요’를 “시청자에게 판단을 맡기겠다”고 평하며, 비난 대신 열린 평가를 제시했다. 이는 그의 겸손한 인격과 동시에 변화를 받아들이는 유연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된다.
1990년대 비디오 대여 사업을 시도하며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지만, 인터넷 보급으로 실패를 경험하고 결국 배우자 이미영과의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나 그는 다시 라디오 DJ, 콘서트, 뮤지컬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특히 그의 외모는 세월을 거스르는 듯한 ‘초동안’으로 화제를 모았고, ‘만년 소년’이라는 별명도 이 시기에 다시 주목받게 된다.
전영록은 최근 유튜브 채널 ‘전영록 TV’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의 히트곡들을 영어로 번안해 부르거나, 통기타만으로 락밴드의 구성 요소를 구현한 ‘네이키드 뮤직’이라는 독창적 장르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는 여전히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음악가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그의 가족 또한 대중문화와 깊은 연을 맺고 있다. 장녀 전보람은 걸그룹 티아라의 전 멤버였고, 차녀 전우람은 디유닛으로 데뷔한 후 작곡가로 활동 중이다. 친모 백설희, 고모 나애심, 사촌 김혜림까지—이 집안은 말 그대로 예술가족의 결정판이다.
전영록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만 살아온 스타는 아니다. 시대의 변화, 가족과의 갈등, 사업 실패 등의 시련 속에서도 그는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켜왔다. 그의 삶은 “인기”라는 일시적인 개념보다 “기억”이라는 본질적 가치로 대중에게 남아 있다.
‘돌아이’라 불릴 정도로 개성 넘치고 자유분방했던 그는, 시대를 넘어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1980년대의 청춘은 그의 노래를 듣고 자랐고, 2020년대의 청춘은 그의 유튜브를 통해 과거를 여행한다. 전영록은 그리하여 하나의 시대를 대표하는 동시에, 세대를 초월한 ‘살아 있는 전설’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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